웰컴투똥막걸리

2005-10-19 11:00
 

중국 문헌만큼 사료로서 믿기 어려운 것도 드물다. 이른바 춘추 필버이라고 해서 대외관계 기록에서 중국에게 불리한 내용은 일방적으로 빼고, 유리한 내용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예쁘게 색칠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네 기록을 마음대로 한다는 데야 남이 뭐랄 수도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누군가 자기 일기장에 다른 사람을 욕했다고 해서 그사람이 참견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기를 쓴사람이 그 일기장을 남들에게 보여 준다거나, 일기장에 쓰여진 사람이 일기를 쓴 사람에게 책잡혀선 안 될 입장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더구나 그사람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면 당한 사람의 심사는 괴롭기만 할 것이다. 그런 문제가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실제로 있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자 눈꼴 사나워한 이들이 있었다. 같은 무관인데 저놈은 권력을 쥐었고 나는 요 모양이니, 입술이 잔뜩 부은 이초와 윤이 일파는 명나라에 연락을 취하고 그 힘을 빌려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당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명의 점수를 좀 땄지만, 아직 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입장은 아니었다. 때마침 명에 사신으로 갔던 이성계측의 조반이라는 친구가 돌아와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린다. 분노한 이성계는 이 일당을 옥에 가두는데 이초와 윤이는 달아나 명으로 도망친다.

 그들은 분풀이 삼아 명나라에서 이성계는 사실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무고(誣告)한다. 이인임이 누군가?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를 갈아 마지않는 고려 말 권신이 아니던가? 말도 되지 않을 얘기지만 명은 옳다구나 하고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자기네 문헌인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해 버린다.

 이성계, 아니 조선 왕실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간신 이인임의 아들이라니? 더구나 이인임은 성주 이씨고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 이건 조상에 대한 모독도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는 그 기록은 허위라고 명에 알리지만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명은 <태조실록>에도 태연히 그 사실을 기록하여 이성계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다시 조선에서 원망 섞인 변명을 해보지만, 소용없다. 하기는 어떻게 태조 황제의 업적을 기록한 <태조실록>을 감히 고칠 수 있겠는가? 일기장도 아니고 공식 문헌에 허위 사실을 기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에 사대하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명이 알아서 고쳐 주기 전까지는 그저 청원하고 또 청원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성계를 탐탐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명의 좀처럼 고쳐 주질 않고 오히려 사사건건 조선을 트집 잡는 데 써먹는다.

 요즘 같으면, 까짓 것 너희 책이니 너희 맘대로 해라 하고 마음 편히 먹으면 될 일이지만, 당시 조선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생각이다. 중국 문헌에 건국 시조의 출신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는 것만도 큰일인데 그것도 수치스럽게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 있다니, 조선 왕실은 중국이 의도적으로 고쳐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태조의 왕통이 잘못 기록된 데서 종계변무(변명이라는 '변'자가 들어 있으니 항의가 아니라 변명이다.)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 문제가 해결을 본 건 무려 200년 가까이 지난 1548년이었다. 선조는 종계변무 주청사를 보내 마침내 조상들을 그토록 괴롭혀 오던 사건을 해결한다. <태조실록>은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두고 <대명회전>에서 드디어 사실을 바로 잡은 것이다. 어찌나 이 문제에 골머리를 앓았던지 선조는 고쳤다는 말만 가지고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고친 <대명회전>을 가져오라고 사신에게 명한다. 드디어 1588년 사신 유홍이 개정판 <대명회전>을 가지고 명의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데, 선조는 너무 기뻐 직접 모화관(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까지 나가 며의 사신을 맞아들인다. 줄을 잘 선 탓에 때마침 그때 사신으로 갔다 오게 딘 유홍에게는 푸짐한 토지가 포상된다. 선조는 <대명회전>을 가지고 종묘로 가서 종계 개정을 조상들에게 보고하는 제사를 지낸다.

 요즘도 잊을 만하면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으로 전국에 반일 감정이 들끓어오르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등한 관계에서 남의 나라 교과서에 실린 내용을 점잖게 '지적'하는 것과, 사대관계에서 조심스럽게 사실 왜곡을 '변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하긴 지금도 일본과 대등한 관계에서 어른스럽게 지적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혹시 일본의 교과서 왜곡도 조선의 경우처럼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해결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조선의 선조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고 당연한 일처럼 의연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용출처 : 상식밖의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