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한국은 온통 '양반'만 사는 나라?!

평민 출신 떳떳히 내세울 수 있어야 진정한 근대인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성(姓)과 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흔히 ‘양반’가의 후손임을 드러내는 증표로 여겨지곤 한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자신의 성과 본이 애당초 양반이 아닌 씨족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우리나라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김씨는 물론이려니와 여간해서 보기 드문 희성을 가진 이조차도 ‘시조 아무개로부터 몇 대 손’이라는 식으로 족보를 늘어놓곤 한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성이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당과 족보를 가진 씨족 집단은 소수의 양반 계층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족보도 없고 따라서 근본을 따질 수 없는 그 숱한 평민들이 일제히 거세 단종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 후손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임씨 성을 가진 내 지인 중 한 사람은 누가 “어디 임씨냐?”고 본을 묻기라도 하면, “공명첩 임가”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익살을 부린다. 사실은 임씨가 아닌데 신분제가 동요하고 족보 위조가 횡행하던 조선 후기 어느 때든 또는 식민지 주민 통제를 위해 민적을 정리하던 일제 초기 어느 때든 슬그머니 임씨 족보로 끼여들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통계학적인 정보만을 대입하자면, 성과 본을 따지는 것으로도 모라자 무슨 파니까지 시시콜콜 주워섬기는 사람 중에 모르긴 해도 적어도 절반 이상은 그런 경우일 것이다. 특히나 김씨 중에서도 8할이나 되는 김해 김씨나 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주 이씨 같은 경우는 가짜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일 것이다. 예컨대 애당초 성이 없던 노비들이 상전의 성씨를 임의로 취했던 경우도 많았고, 그런 경우에는 서너 대쯤 거슬러 내려와 아무도 그 옛날의 일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족보의 제작비를 부조하는 것으로 씨족의 일원임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온통 ‘양반’의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성과 본을 묻고, 혹시라도 동성동본이라도 만날라치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항렬과 촌수를 따지고 드니, 세상에 이런 ‘눈 가리고 아웅’이 어디에 또 있을까. 게다가 자신이 ‘양반’가의 후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그 가련한 허위 의식보다 더 희한한 것은, 사실상 별다른 의미도 없는 씨족의 표지를 또 누구나 곧이 곧대로 진지하게 믿어준다는 것이다. 하기사 따지고 보면 자기 뒤도 구린 판국에 굳이 남의 뒤를 의심해서 공연히 ‘긁어부스럼’을 낼 일이란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온 나라가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에서처럼 거대한 기만의 희극을 연출하고 있다. 나는 본관이 어디니, 무슨 파니, 몇 대 손이니, 항렬이 어떻게 되니, 이런 걸 진지하게 따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보면서도 “그 옷 참 멋있다”고 아첨을 해대는 동화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 들곤 한다.

   나아가 설령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양반’가의 적통임이 어김없는 사실이라 한들, 그게 뭐가 그렇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근대 정신이란 다름아닌 ‘평민 정신’이다.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임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인’일 것이다. 그리고 “공명첩 임가”라고 익살을 떨던 친구가, 벌써 1백년 이상의 근대화 역정을 거쳐왔다는 한국 사회에서 사십 년 가까이 살면서 내가 만난 거의 유일한 ‘근대인’이다. 근대적 주체가 없는 ‘근대’를 살아내는 일이란 앙꼬 없는 찐빵을 먹는 것만큼이나 고역스러운 일이다. ‘양반’의 허울을 벗어 던진 당당한 평민들의 등장을 보고 싶다.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