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삼국사기」 이래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정사(正史)를 통독할 때 커다란 특징 중 하나가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여성들이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해도 여성들이 이름이 있다. 특히 신라사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다가 「고려사」에 이르러 여성들은 이름이 사라지고 시호라든가, 경주김씨 따위의 대명사로만 기록되는 경향이 현저해 진다.

하지만 이것이 「고려사」 편찬의 원본이 되었을 고려 당대 기록에는 그렇지 안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려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적 관념에 투철한 학자들에 의해 편찬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이름을 대거 잃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세조실록」만 해도 여자들이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중기를 넘어서면서는 급격히 여성들은 이름이 탈락되기 시작한다.

어떤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여성을 '말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요즘 페미니즘 계열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이전 시대를 살다가 간 허난설헌이라는 여인을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감지되는데, 실제 그에게서는 이러한 면모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자칫 대단한 오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허난설헌 시대까지만 해도 조선은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성리학 일변도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난설헌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미암 유희춘이라는 사람이 남긴 10년치 일기인 「미암일기」에 나타난 그의 부인 송덕봉은 대단한 여장부인데 허난설헌이나 송덕봉이 그 시대 특출난 여성운동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 여성은 대체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최근 공개된 8세기 초 신라사람 김대문의 저작인 「화랑세기」가 불러일으킨 매머드급 폭풍의 하나가, 종래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여성상의 완전한 해체라는 점이다.

예컨대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은 즉위할 때 일곱 살이라 태후가 섭정을 했다고만 했으나, 막상 「화랑세기」를 통해 드러난 그 어머니 지소태후는 여느 남성을 능가하는 막강 권력자였다.

진흥왕을 비롯해 그 아들 진지왕, 손자인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3대를 색공(色供)한 미실(美實)이라는 여인 또한 그 권력이 하늘을 찔러 왕이 되면 황후를 시켜주겠노라는 약속을 어겼다 해서 진지왕을 폐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후대 유학자들에게 묘사된 여성은 제아무리 위인이라 해도 그 평가가 인색하기 짝이 없다.

고려를 사실상 통치했던 천추태후에 대한 「고려사」의 평가는 음란의 대명사이며, 실제 왕이 되었던 선덕.진덕.진성의 세 신라여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평가 또한 요컨대 "암닭이 울면 집안(국가)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역사 전문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덕일씨가 유려한 필체로 엮은 「여인열전」(김영사)은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주역인 소서노를 필두로 조선후기 거부 김만덕 및 일제시대 최용신에 이르기까지 여장부 24명에 대한 '복권'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여성억압과 남성지배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여성들을 부활시키고 싶었다"고 말한다. 504쪽. 1만7천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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