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 보한집(補閑集), 파한집(破閑集), 동문선(東文選) 등 고문헌(古文獻)에 전해진 단편적인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중국(中國) 송대(宋代) 화단의 기풍에 따라 화국(畵局) 또는 화원(畵院)이라 일컫는 회사(繪事)를 주관하는 관서가 있었고 이미 직업화가들과 여기적(餘技的)인 왕공(王公), 귀족 및 학자, 문인 등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화가 등 두 계열이 있었다.

  비록 화풍으로 분명하게 갈라진 것도 아니었고 막연하게 출신성분으로 갈라진 풍조였지만 지식층과 상류층의 이러한 화단 참여는 회화예술을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적지 않이 기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충선왕(忠宣王) 등 역대의 군왕을 비롯해서 귀족, 학자, 문인, 승려 등이 수묵산수(水墨山水), 영모(翎毛), 화훼(花卉), 사군자(四君子)를 그렸고, 때로는 초상화(肖像畵), 불화(佛畵)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특히 도형공신(圖形功臣)과 영전(影殿)의 성행으로 초상화(肖像畵)의 수요가 늘게 됨에 따라 초상화(肖像畵)는 비상한 발달을 보였던 것 같다. 지식인들의 여기화가(餘技畵家)로는 산수(山水)와 화훼(花卉)를 그린 정지상(鄭知常 ?~1135), 묵죽(墨竹)을 잘한 불화(佛畵)의 명수 해애(海涯)와 혜허(慧虛), 산수(山水)와 인물(人物), 화조(花鳥)를 모두 잘한 공민왕(恭愍王 1351~1374) 등 그 수가 매우 많았다.

  특히 공민왕(恭愍王)은 일세의 풍류왕자(風流王子)로서 마치 북송(北宋)의 휘종황제(徽宗皇帝)와 대칭될 만한 군주화가였다. 그는 북송(北宋) 원체풍(院體風)의 화조(花鳥), 인물화(人物畵)에 뛰어났으며 그의 중국회화 수집은 당시의 고려 화단의 화풍 진작에 까지 큰 작용을 미칠 만큼 방대한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가 그렸다고 하는 애비(愛妃)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초상(肖像)은 아름다운 전설로써 익히 알려져 있으나 전래되지 못했고 그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단편이 국립중앙박물관, 덕수궁미술관, 국립서울대학교 등에 각기 소장되어 있으나 그 유래를 확인할 도리는 없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제현(李濟賢) 필(筆)이라고 전해오는 대렵도(大獵圖) 한 폭이 있어서 그 시대의 화풍과 화격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 사경(寫經)의 권두(卷頭)에 금니(金泥)로 된 불화의 예를 볼 수 있으며 담화(淡畵)로 된 소병자(小屛子)에 강도(江都) 선원사(禪源寺) 반두(班頭) 노영(魯英)이 그렸다는 대덕(大德) 11년 8월 작(作) 석가여래내영도(釋迦如來來迎圖)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직업화가를 대표할 만한 작가는 이영(李寧 12세기)이었다. 그는 산수화에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작품 예성강도(禮成江圖)와 천수원도(天壽院圖)는 당시 북송(北宋)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을 이끌어 온 휘종황제(徽宗皇帝)의 상찬을 받았음이 고려사(高麗史)에 전해 온다. 이로써 보면 그의 화풍은 휘종황제가 이끌어 온 북송(北宋) 원체화(院體畵) 계열(系列)에 속하는 명수였음이 짐작된다.(계속)

                                (천산대렵도 전 공민왕)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뚜렷한 화적(畵蹟)으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통을이은 개성(開城) 수락암동(水落岩洞) 고분(古墳)(11, 12세기)과 장단(長湍) 법당방(法堂坊) 고분(古墳 13세기), 개성(開城) 공민왕릉(恭愍王陵 1374) 등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그림이 있고, 보살상(菩薩像)과 인왕상(仁王像)을 그린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 1377), 수화도(水花圖), 야화도(野花圖)를 그린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 벽화(壁畵 14세기) 등이 있으며 1971년에 발견된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창(居昌) 고려고분(高麗古墳 11, 12세기)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사신상(四神像)에 곁들여서 주악상(奏樂像), 사신상(四神像)에 곁들여서 주악상(奏樂像), 무용군상(舞踊群像) 등이 남아 있다.   이들 고려 고분벽화들에는 먼 고구려시대 고분벽화의 여운이 남아 있으며 크게 변모된 것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벽화의 주제로 등장했고 사신상(四神像)은 부차적으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밑에 그려진 점이다.   이들 교분벽화들과 불교사원 벽화는 길고 유려한 선묘로써 윤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에 밝은 색조의 설채(設彩)를 한 것으로 고려적인 선묘(線描)의 성격이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상황이나 조선시대 초기 회화들을 참고로 할 때 고려의 화단은 대체로 12세기 무렵까지는 당말(唐末) 오대(五代) 화풍(畵風)의 여운이 남아 있었음직하고 그 후로는 점차 북송(北宋), 남송(南宋)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이 짙게 고려회화의 화풍 진작에 작용하면서 점차 고려회화의 특색을 세련시켰으리라고 믿어진다.   즉, 송대(宋代)의 곽약허(郭若虛)는 그의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서 고려회화를 가리켜서 “고유단청지묘(固有丹靑之妙) 개유풍격(皆有風格)”이라고 고려회화의 고유 풍격을 상찬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고려회화에 나타난 고려적인 특색은 이미 그 시대 외국 비평가의 주의를 끌 만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국(日本國) 경도(京都) 금지원(金地院)에 있는 고연휘(高然暉) 작(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경도(京都) 상국사(相國寺)에 있는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  동경(東京) 천초사(淺草寺)에 있는  혜허필(慧虛筆) 양유관음도(楊柳觀音圖), 그리고 최근에 알려진 구주(九州) 웅본(熊本) 당진시(唐津市) 경신사(鏡神社)의 관음도(觀音圖)는 그 중에서도 고려 불화의 위신을 세워 주는 걸작이다.   일본에 남아있는 이들 13~14세기 고려시대의 회화가 보여 주는 당당한 관록과 특색은 곽약허(郭若虛)의 비평에 상부(相符)한 내용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끝)                 (양유관음도)                          (거창 주악천녀도)                  (고려벽화 : 개성 수락암동)                   (노영 지장보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