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과 불나비에 대한 추억
1944년 8월생. 본명은 김무웅(金武雄)이며 영남대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아마도 대학교 재학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경제 주간지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며 데뷔한 그는, 1972년 『유모어』를 비롯하여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명랑-코믹 만화와 역사-시대 만화, 그리고 무협 만화를 발표했다.
그러던 차에, 1973년 작가 김 민은 지금까지도 한국 무협만화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불나비』를 발표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인 “불나비”는 이를테면 이 작품의 배경인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영웅들이 권력을 얻고자 각축을 벌이던 모습이 마치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비’와 같다는 것을 상징하는 측면에서 사용된 것이었으나, 마침 주인공인 “소년”의 이름이 없던 터라 독자들이 주인공을 ‘불나비’라고 부르던 데서 자연스레 주인공의 이름이 되어버렸으며, 이런 묘한 상호작용을 거쳐 『불나비』는 작품의 주제를 상징하는 말이자 주인공 “불나비”를 나타내는 제목으로 굳어져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에피소드는 당시 이 작품이 얼마나 독자들로부터 많은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준이라 할 것이다.
5년여에 걸쳐 시리즈로 발행되고 그 뒤로도 간혹 판(版)을 달리하여 발표된 『불나비』 이후로도, 김 민은 1974년 『인간 제로 지대』를 비롯하여 1975년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1시의 탈출』과 『2시의 탈출』 같은 극화를 발표하고, 1976년 무렵부턴 『허떨이와 맹이』와 같은 “허떨이” 관련 시리즈들 , 1978년 『숲 속의 사람들』을 비롯한 코믹 아동 만화들을 발표한다. 원시시대와 현대까지 다양한 시대를 아우르며 때론 심오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엮어가는 이 작품들은 그의 극화 작품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민족의식이라든가 사회 비판적 시각 같은 것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진행되며, 사이사이 철학적 깊이까지 느낄 수 있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 민의 작품 활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하여, 이후 1990년대 초반 창작을 그만두고 만화계를 떠나게 되는데, 1978년과 1981년엔 각각 동의보감(東醫寶鑑)과 허준의 생애를 내용으로 한 『대도』와 『거인의 길』을, 그리고 1980년대 후반까지 『불타는 대지』를 비롯하여 시대 역사극인 『대장군』,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잔혹한 태양』, 그리고 『도공의 뿌리』와 『접시 물에 빠진 사나이』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김 민은 두터운 펜 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사실적인 그림체와 만화적인 과장됨이 한껏 살아있는 간결한 그림체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사용한, 그야말로 독특한 그림체를 구사한 만화가로, 지금까지도 비슷한 유형의 작화 스타일을 찾기 힘든, 가히 1970~1980년대 한국 만화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창조한 대표적인 주인공 “불나비”는 (「씨네 21」1997년 1월호에 실린 만화 평론가 황민호의 평을 빌자면) “외모로 보나 내면세계로 보나 한국 만화사상 가장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가진 캐릭터”로 평가 받고 있으며, 아울러 그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 비판적 시각이나 작가 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팬들과 후배 만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만화/캐릭터 한국만화사 11
목탁 대신 검을 든 구도자
‘불나비’는 물론 `불나비'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될 당시‘불나비’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작품의 배경 이 된 춘추전국시대에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영웅들의 모 습이 마치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비의 욕망과 같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제목이었다. 그러나 `불나비'에 등장한 주인공 소 년의 이름이 없던 터에 독자들이 그 주인공을 그대로 ‘불나비’라고 부 르기 시작한 데서 주인공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불나비’는 김 민이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독자들의 호응과 관심이 부추긴 캐릭 터였다. 어쨌든‘불나비’는 `불나비' 시리즈를 통해 꾸준히 등장하면서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만화주인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주변의 음모에 의해서 패망한 성주의 아들인 어린 소년 `불나비'은 폐허가 된 성터에서 할머니와 외롭게 살아간다. 불나비는 자연 속에서 자연의 위 대함을 배우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벌레, 뱀, 원숭이 등의 움직임을 관찰 하면서 스스로 날랜 몸동작을 터득하고 힘을 키운다.
불나비는 자라면서 할머니로부터 아버지의 복수를 종용받지만 선천적으로 고운 심성을 갖고 있는데다 스님들과의 만남을 통해 복수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청년이 된 불나비는 검을 통해 삶의 이치를 알아 가는 과 정에서 무림계 천하제일검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이때부터 불나비는 천하제일검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무림계의 고수들로부터 끝없 는 도전을 받는다. 이런 과정에서 불나비는 오히려 천하제일검으로서 지 녀야 할 덕목에 대해서 눈뜨게 된다.
지배계급이나 힘있는 사람들한테서 핍박받고 억압당하는 민중들을 돕는 과정에서 천하제일의 무예라도 올바로 쓰여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 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선과 악이 어떻게 형상화되는 가도 알게 되고 검을 통해서 그릇된 심성을 선의 심성으로 선 도하기도 한다. 불나비는 마침내 진정한 도는 참선과 정진을 통해서만 얻 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다.
`불나비' 시리즈를 통해 보여지는 불나비는 선량하고 진지한 사람이다. 5 세 소년에서부터 20대 후반 청년까지 묘사되고 있는 불나비의 모습은 순 수한 자연을 닮아 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전혀 때묻지 않은 어진 심성 을 갖고 있어서 공격적이지 않으며 사람을 죽이지도 않는다. 검을 다룰 줄 안다는 것 외엔 무사로서의 요건을 거의 갖추고 있지 않은 불나비는 무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구도의 길을 걷는 수도승의 모습이다. 목탁 대신 칼을 쥐었을 뿐이다.
적극적인 주인공으로서 작품의 전면에 나서서 작품을 이끌어가는 구실보 다는 결론을 내고 마무리 짓는 해결사의 구실에 더 가깝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불나비의 이런 캐릭터가 `불나비' 시리즈를 무협만화가 아닌 인 생독본으로 인식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감정을 표출하는 일 없이 늘 과묵하고 그늘진 표정의 불나비는 냉혈한의 이미지를 갖고 있 지만 그것은 경지에 이른 사람의 무념무상이다. 실수를 하기도 하고 깊이 뉘우치기도 하면서 불나비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래서 불나 비는 외모로 보나 내면 세계로 보나 한국만화사상 가장 심오한 철학적 깊 이를 가진 캐릭터이다.
이런 철학적 성찰과 아울러 김민의 만화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색 은 사회성 짙은 드라마의 추구이다. 박재동에 의하면 김민은 우리 만화계 에 사회비판적인 시각의 작품을 등장시킨 최초의 작가이다. `불나비 대검' 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핍박받는 민중을 돕는 과정에서 불나비가 터득하는 진정한 검의 목적에 대한 언급은 70년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밖에도 `탈출' 시리즈나 `춤추는 허수아비' `도공의 뿌리' 등의 극화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김민의 작가 정신은 만 화독자들의 잠자는 의식을 일깨우고 만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데 기 여했다. 이런 김민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공로자는 역시 ‘불나비’ 이다.
황민호/만화평론가 
Copyright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7일
* 2001년 12월 심프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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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비를 찾아서
겨울 밤. 창백한 달빛. 그 빛을 머금고 화사하게 피어나는 흰 매화. 담장 사이로 난 자갈길.
거친 숨소리. 어둔 밤하늘에 흩뿌려지는 선혈. 혈조에 괴인 핏물을 뿌려내는 무심한 칼놀림.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이상은. 나의 삶은….’
주인공의 독백과 고뇌. 비극이 숨어있는 정적인 구도. 상념을 따라 연결되는 이미지의 고리.
<바람의 검신>의 OVA ‘추억편’은 충격이었다.
폭력의 잔인함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결코 이를 예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맹목성과 그 비판의 목소리를 함께 담고 있으며,
다소 현학적이지만 두고두고 곱씹게 하는 내레이션을 갖춘 작품.
나의 욕망은 확실히 이러한 걸 고대하고 있었다.
쓴웃음을 자아내는 코믹한 상황, 발정난 수퇘지처럼 껄떡거리는 캐릭터,
유행어처럼 읊조리고 싶은 한마디의 대사조차 없는 빈곤한 구성에 지쳐버린
나의 뇌세포는 사색의 여백을 담고 있는 이러한 작품을 갈망하고 있었다.
문뜩 깨달았다. 나는 이러한 장면, 이러한 독백을 과거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음을.
그리고 오래지 않아 25년도 넘은 기억의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김민의 <불나비>와 마주 대하게 되었다.
나무로 된 폭 좁은 긴 의자가 놓여있고, 고무줄을 댄 서가에 줄줄이 책이 꽂혀있던
만화방에서도 <불나비>의 자리는 언제나 후미진 그늘 속이었다.
조치원(운?)의 괴기만화와 어깨를 나란히 한 곳에.
그 우울한 자리에서 불나비는 자신의 고민을 내게 들려주었다.
왜 가문의 복수를 위해 칼을 들어야 하는지, 왜 자신에게 사람들이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직 어려서 아무 것도 이해 못하는 내게 들려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불나비는 종종 나를 찾아왔다.
아니 내가 그를 찾았다.
언제나 고도를 기다리는 듯, 고독한 몸짓을 하고 있다가도 불나비는 나를 반기며
여전히 알지 못할 질문을 던졌고, 어리둥절해 하는 내 표정에 그는 늘 씁쓸히 뒤돌아서곤 했다.
놀라웠던 것은 이 <불나비>의 골수팬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오직 나만이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386세대로 만화 깨나 읽었다는
주변 사람들은 물론, 인터넷 여러 커뮤니티에서 불나비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적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에 있는, 만화에 관심이 많은 30대 초반의 남자입니다.
여러 사람들과 만화에 대한 토론을 하다 김민의 <불나비>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약간 거론이 된 상태라 조금은 알겠는데,
상세하게 내용도 알고 싶고 만화체도 보고 싶고 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혹시 김민의 <불나비>를 아시는 분이나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구입할 용의도 있으니 메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동윤, 2000/08/27)
“김민 님의 <불나비>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요.
초등학교 시절에 불나비를 보았는데 무척 재미있게 보았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만화가게를 뒤져보았는데 없었습니다.
그의 만화를 어디에 가면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방법이 있는지요.”
(신주연, 1999/08/01)
“김민의 <불나비>라……. 갈대숲, 돌팔매질, 만월, 날아오르는 새떼들….
거의 예술이었죠! (나려타곤, 2001/08/30)
“커억! 김민의 <불나비> 얘기를 여기서 보다니 정말 추억의 명작 만화지요.
‘학권연정’이니 뭐니 하는 그런 얘기도 저는 그 만화에서 처음 봤어요.
아직도 궁금한 게 소림사에서 비급 도둑질해서 고수된 사람 있잖아요.
이 사람하고 주인공하고 싸웠나요? 그전까지만 봐서 후를 몰라 되게 궁금하던데,
결과는 빤한 것이겠지요. 아, 만화로 보고 싶당.” (검몽, 2001/08/30)
“김민이라. 하하 정말 추억이네요. 김민의 작품은 그 특유의 그림체하고 -
판화와 동양화를 합친 듯한 - 여러 명작들을 번안한 내용이 매력적이었죠.
오랜만에 듣네요. 정말 ^^.”(서효원 애독자, 2001/09/02)
“고전인디…. 저두 당시에는 김민 씨한테 푹~ 했는디,
어느날 안보이기 시작하더만 걍 계속 잠수만….”(엽이, 2001/09/12)
“저도 국민학교 때와 중학교 때 열심히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정말 좋은 책입니다.”
(김규회, 2001/09/12)
“쌍검을 휘두르는 모습, 장발의 머리…”(광한지, 2001/09/12)
“선생님 작품은 어떤 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나요?”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에 김민 씨의 <불나비>를 좋아했어요.”
(만화가 강경옥이 ‘댕기’와 가진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왜 <불나비>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불나비>는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매력을 전해주었을까. 여러 사람의 기억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불나비>의 대강의 모습은 이러하다.
<불나비>는 과거에 절도사를 지낸 아버지를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잃고 가족 모두가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그 후 아버지의 부장에게 무술을 배우는데, 그 배움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고 오히려 무술을 배우면서 자아에 눈 떠 자기 스스로 무술을
깨우치게 되며, 그러면서 최고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만화는 이미 최고수의 자리에 올라선 불나비의 회상으로 시종일관한다.
칼 대신 호미와 괭이를 잡고 폐허가 된 옛날의 화려했던 궁터에서 조용한 삶을 바라는
불나비와 천하 최고수의 명성을 얻기 위해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도전자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천하 최고수의 명성을 위해 혈안이
되었던 지난날들의 엇갈린 회상 기법이 이 만화의 정조를 문학적인 것으로 이끈다.
만화의 제목이기도 하고 주인공의 별호이기도 한 부나비는 헛된 욕망을 상징한다.
(평론가 함성호 님의 도움말에서)
가장 뛰어난 무협만화로 꼽히는 김민의 <불나비>는 고승의 선문현답 같은 형식으로
무림의 복수나 협행을 떠나 인간의 번뇌, 보다 높은 도를 다룬 작품이다.
‘과연 천하제일의 무사 불나비로구나! 헙수룩한 듯한 자세에서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질 않는구나. 두렵다. 내가 과연 저자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산사에서 울리던 범종소리도 그친 지 오래되었다. 정적만이 감도는 숲 속,
회백색의 하늘에선 어느새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차갑구나! 날씨가 흐리더니만 결국 눈이 오는구나.’
불나비는 앞에 서 있는 자의 검 끝에서 느껴지는 곧 터질 듯한 긴장감조차 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길 것이야… 제 아무리 불나비라도 나의 검을 무시하다니…
천하제일검이란 위명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지며 이마 위를 가로지르던 한줄기 땀방울이 콧잔등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두려움으로 인한 긴장감을 분노로 바꿔 폭발적인
기세로 쏘아져 나갔다.
‘아! 아름답구나!’
불나비는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잡으려는 듯, 손을 위로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검을 쥔 채로.
그는 달려오던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나무뿌리에 걸려 쓰러지며, 하늘을 쳐다봤다.
떨어져 내리는 눈을 감당하기 어려운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데 하얀 눈 위에 점점이
뿌려진 붉은 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름답구나.’ 생각하면서.
불나비는 눈 위로 찍히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떠나갔다.
(조영재 님이 <무림향> 자유게시판에 기고한 글에서)
불나비는 도공을 찾아갔다. 그 날 이후 불나비는 고된 물레질부터 시작하여
그릇 빚기를 익혀나갔다.
자칫 힘이 들어가면 어김없이 일그러지는 흙 반죽. 불나비는 마음 비우는 법을
깨달아갔다.
그리고 이를 숨어서 지켜보는 한 사람.
어느 여름날 밤, 불나비는 검을 든 채 마당에 내려섰다.
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불나비.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숨어서 지켜보던 그 사람이 불나비가 있던 자리에 다시 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얼굴에 부딪쳐오는 날벌레에 손을 내젓던 그는 드디어 발견한다.
발밑에 무수히 쌓인 날벌레의 무더기를.
그러던 어느 날, 불나비는 한 점의 자기를 두고 떠난다.
손님이 떠난 것을 확인한 도공이 방문을 열었을 때 비로소 발견한다.
완벽한 균형과 조화의 미를 보여주는.
불나비는 갈대숲을 지난다. 파드득 날아오르는 새떼.
그는 하늘을 본다. 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는 보름달.
‘아름답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 미소를 잡으려는 듯.
새떼와 함께 날아오르던 자객들은 어느새 차가운 땅 위에 몸을 눕힌다.
난석군. 그 뒤에 몸을 숨긴 자객들. 적지 않은 숫자다.
불나비는 몸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옛 생각에 잠긴다.
유모.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부들거리며 말한다.
도련님, 복수를.
불나비는 고개를 내젓는다.
혈한을 잊어선 안 됩니다.
폭풍처럼 덮쳐오는 자객들의 공세.
꽃이 핀다. 복면을 한 이들의 칼부림이 매섭다.
석류가 벌어진다. 꽃이 떨어진다.
(여러 사람의 기억을 모아서)
불나비의 매력은 굵고 빠른 붓 터치에 있다.
마치 ‘달마도’를 연상케 하는. 세밀한 선으로 촘촘히 여백을 메운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베가본드>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함성호 님은 웹진 ‘펜슬’(pencil.kyobobook.co.kr) 2001년 2월호 에 기고한 글에서
그 과감한 여백이 이 작품의 문학성과 철학성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나는 그 만화를 보면서 어떤 교양서적도 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그 육체와 육체의 향연 속에 펼쳐지는 진지한 철학적 성찰은
이후의 그 어떤 만화도 뛰어 넘지 못한 압권, 그 자체였다. 굵고 강한 펜 터치의
육체와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고요함을 잃지 않는 ‘불나비’의 모습, 그리고 허무.
일체의 배경을 과감히 지워나가면서 그려지던 성의 풍경과 천하제일검의 허명을 찾아
도전해 오는 무사들의 욕망. 나는 그런 것에 넋을 빼앗겼다. 김민의 '불나비'는
간단한 몇 개의 선으로 허무를 드러내는 유려함이 있다.”
<불나비>를 찾아 나선 지 벌써 이 년이 가까워진다.
황학동, 청계천 고서점가, 지방 중소도시의 헌책방 등 있을만한 곳을 다 헤집고
다녔다고 여겨지지만, 어디로 숨었는지 <불나비>는 끝내 그림자 한 자락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더 이상 책을 찾아나서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되자, 방향을 바꿔서 작가 김민 선생의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작품이 없다면 작가라도 만나고 싶은, 그래서 작가가 의도했던
불나비를 듣고 싶은, 또 운이 좋다면 불나비의 예전 원고나 간행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에서였다.
먼저 한국만화가협회에 메일을 띄워 알아보았다.
대답은 그쪽에서도 어떤 자료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던 중, 부천에 자리한 만화정보센터에 들렸다.
여기에 소장된 김민 선생의 작품은 <절세신검> 딱 한 질.
신검과 귀검에 얽힌 전설과 이를 현대에 재현하려는 장인의 후예.
그의 갈등과 구도의 과정.
역시나 소설 <만다라>를 읽는 듯,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을 읽는 듯, 현학적인 지문.
‘… 그리고 보였다. 한 마리 새가. 온 전신이 빨간 불새였다. 새는 날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결코 날지 못했다. 아! 그 새가 빨간 것은 자신의 부리로 자신의 가슴을
계속 쪼아대어 그 몸에서 나오는 피로 흰 깃이 저토록 붉게 물든 것을….’
책장을 넘기던 중, 나는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네 쪽 정도에 걸쳐 불나비가 등장한 것이다.
활검과 사검으로 갈라지는, 검의 기를 설명하던 대목에서.
책 뒷장의 판권을 살펴보았다. ‘1983년 초판 발행.’
1973년 불나비의 발표 이후 꼭 10년이 지난 작품에서 발견된 불나비는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굵은 선은 어느새 가느다란 터치로 바뀌어 있었고,
과거의 음울하던 외피를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밝은 표정이었다.
<불나비>를 찾는 일에 처음으로 단서가 잡혔다.
판권에 나타난 민들레문화사로 전화를 했다. 역시나 결번.
이번엔 대표자의 이름을 검색하여 주소 등으로 미뤄 유력한 연락 전화번호를 추려냈다.
“김민? 내가 그 사람 꺼 많이 냈지. 연락처는 나도 몰라. 하도 오래되어서.”
“원고? 하도 낡아서 다 내버린 지오래야. 책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럼 여기 전화해 봐. 이재학 사무실이야. 예전에 거기서 줄거리 쓰고 그랬지, 아마.
거기선 알거야.”
“네, 맞아요. 이재학 사무실입니다. 그건, 총판에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요?”
“어, 김민이라. 그건 왜 찾소? 모르지…, 연락 끊긴 지오래야.
아마도 작가들에게 물어봐야 할 거야. 뭐, 이상무나…….”
이제는 <불나비>를 찾는 일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여러 옛날 작가들에게 수소문하면 아마도 알 수 있으리라. 거기서도 알 수 없다면
이미 다른 방법도 생각해 두었다.
90년대 초반 ‘스포츠조선’에 만화를 연재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곳을 통해서 찾아보는 방법도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숨을 고르고 싶은 생각이다.
정작 작가 김민 선생을 만나게 되면 무슨 이야길 해야 될는지 막연하기 그지없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불나비>를 다시 찾는 게 잘하는 것인지도 의문스럽고.
마치 떠난 지 오래인 옛사랑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게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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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bc89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