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드라마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사극 전반의 명칭 사용에 대한 사소한 문제제기 정도? 


최근 여기저기서 드라마 <주몽>의 '금와'에게 부여된 '부여 황제'라는 명칭을 여러가지 이유에서 지적하고 있다. 부족들의 연맹체 형식의 국가였던 부여에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도 이상한데 한제국이 설치한 한사군의 현토군 태수가 황제국만 쓸 수 있는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의 수장에게 불러주는 것도 이상하다 등등이다.   

역사에 근거해 유추해보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부여의 금와가 대내외적으로 '황제'로 불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드라마 <주몽>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고 있어서 이것이 드라마 <주몽> 월드가 실제 역사와 그 경계를 분명하게 하고 있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니 비단 <주몽> 뿐만이 아니다. SBS의 <서동요>에서도 백제나 신라나 왕들은 다들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또 불렸다. 내 기억이 맞다면 최초로 고려시대를 (장편으로) 다뤘다는 <태조 왕건>에서부터 견훤이 후백제의 황제로, 궁예가 후고구려(이후 태봉 마진 등등)의 황제로 등장했던 것 같다. 이런 칭제는 <태조 왕건>의 후속작으로 광종대의 고려를 다룬 <제국의 아침>을 거쳐 <무인시대>로 이어졌고 <주몽>과 <연개소문>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의 경우에는 '황제'가 아니라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존칭은 '황제'와 동일한 '폐하'다. <연개소문> 공식 홈페이지에서 역사 자문단들은 '태왕'이라는 명칭에 이러한 견해들을 피력하고 있다.  

[에세이] 태왕과 왕은 다르다. - 윤명철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http://nbbs3.sbs.co.kr/index.jsp?cmd=read&code=tb_Somun_column5&top_index=&field=&keyword=&no=28&page_no=1

'환단고기'를 비롯한 이른바 '민족주의 사관'에 투철한 사서들은 고구려의 수장을 '열제列帝'라고 표현하고 있다. '장수왕'의 경우 '장수홍제호태열제' '문자명왕'을 '문자호태열제'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열제'라는 기록의 근거로 중국 사서인 <수서>를 들고 있다. 소수림왕을 '소열제小列帝'로 표현했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반론 역시 <연개소문> 홈페이지에 개재되어 있다.    

고구려 임금의 호칭 '태왕'에 대하여 - 김용만 (우리 문화 역사 연구소장)
http://nbbs3.sbs.co.kr/index.jsp?cmd=read&code=tb_Somun_column2&top_index=&field=&keyword=&no=11&page_no=1

 먼저 소열제(昭烈帝) 논란이다.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位宮玄孫之子曰昭列帝，爲慕容氏所破"(위궁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고 한다, 모용씨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즉 여기서 소열제는 고국원왕을 지칭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위서 고구려전을 보면

  "利子釗，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미천왕 아들 쇠(고국원왕)는 열제  때에 모용씨와 서로 공격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기록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소열제’와 ‘쇠, 열제때에는’

  두기록을 비교해보면, 『위서』가 원본이고, 『수서』는 그것을 다시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열제"는 북위의 건국자인 탁발규가 도무제라는 이름으로 칭제를 하면서 자신의 조상인 예괴를 추존하여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장을 잘못 끊어 읽으면서 소열제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수서』의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수서]외에는 다른 기록에 고구려 임금을 제(帝)라고 기록한 것은 없다.

이 글의 요지는 글 말미에 잘 드러나 있다.

삼국시대에는 ‘황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각국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도 아니다. 고구려와 신라 등은 황제가 아닌 ‘태왕’ 호칭을 사용하였고, 태왕이야 말로 진정으로 고구려, 신라 등에서 사용한 진정한 왕중의 왕, Emperor였던 것이다.

'태왕'이 우리식 '황제emperor'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황제국 체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소개해본다. (필자와 이 반론의 논지가 동일하지는 않다)
 
고려는 과연 제국이었을까
http://ralrara.blogspot.com/2006/02/blog-post_113948322786701611.html

이런 저런 이야기들 : 3번
http://ralrara.blogspot.com/2006/06/blog-post_115004584497230638.html


다시 '황제'와 사극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중국이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해서 상고사나 삼국,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김용만 연구소장'의 글에 근거해 볼 때 좀 우스운 경우가 된다. 상고시대나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황제'는 커녕 '왕'도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이들에게는 낯설고 이질적인 '한족식 호칭'이었던 것이다.   

신라가 중국식 왕호를 채택한 '법흥왕' 이전까지 '거서간' '마립간' '이사금'등 국가수장을 이르는 고유한 명칭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경우는 어떨까? 영화 '황산벌'에서 당과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리려 급히 궁성으로 뛰어들어오던 두 명의 병사는 '어라하~'라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다.  

중국의 사서인 <주서>에서 백제의 지배계층들이 왕을 이를 때는 '어라하(於羅瑕)', 일반 백성들은 '건길지(腱吉支)'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본서기와 같은 일본 측 기록에서 백제의 왕을 '코니키시(Konikisi, Kenkici, Komikisi 혹은 Konisi)라고 적고 있다. 즉 '건길지'의 백제어(혹은 고대 일어)는 '코니키시'로 '코니'는 큰 '키시'는 '국가의 수장' 즉 '왕'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길지吉支(Kisi, 길지)'라는 명칭이 '기자(箕子)조선'의 그 '기자(箕子)'라는 설도 있다. 즉 '기자'가 중국에서 온 성인이 아니라, '왕'을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라는 이야기다.  

http://72.14.203.104/search?q=cache:XKUAUtpaYFcJ:hkh336.egloos.com/600719+%EA%B8%B0%EC%9E%90%EC%97%90+%EB%8C%80%ED%95%98%EC%97%AC+%EA%B3%A0%EB%9E%8C&hl=ko&gl=kr&ct=clnk&cd=2

(출처는 현재 막혀있는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 고람고사님 이글루스 블로그)

그렇다면 고구려에는 이런 순수한 고구려식 왕칭이 없었을까? 도수희 충남대 교수는 이런 학설을 내놓은 바 있다.

http://www.dongailbo.co.kr/docs/magazine/shin/2004/04/29/200404290500046/200404290500046_3.html


백제는 왕을 ‘어라하(於羅瑕)’ 혹은 ‘건길지(?吉支)’로 존칭했다. 고구려어로는 ‘개’ ‘해’(諧)라고 불렀다. 중국 ‘위서’에 보면 유리명왕이 ‘노려해(奴閭諧)’로 적혀 있는데 이 ‘해(諧)’는 백제어 ‘어라하’의 ‘하’와 일치한다. ‘삼국사기(지리2)’의 지명에서도 왕이라는 뜻의 ‘개(皆)’가 여럿 발견된다. 예를 들면 ‘개지(皆次=王岐)’, ‘개맞이(皆伯=王迎∼王逢)’ 등에 쓰인 ‘개’가 같은 말이다.

‘개’는 고구려의 ‘상가, 고추가, 소노가(相加, 古鄒加, 消奴加)’와 같이 관직명 아래에 붙여 쓰이기도 했다. ‘가’는 신라어의 ‘거서간, 마립간, 각간(居西干, 麻立干, 角干)’의 ‘간’(干)과 일치한다. 받침 ‘ㄴ’의 유무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벼슬인 ‘막리지(莫離支)’와 백제의 벼슬 ‘건길지(?吉支)’에서 ‘지(支)’가 일치한다. 또한 어소인 고구려의 ‘막리(莫離)’와 신라의 ‘마립(麻立)’도 ‘ㄱ’과 ‘ㅂ’받침을 무시하면 ‘마리’로 일치한다.

즉 삼국시대까지도 한반도는 한문식 중국식 명칭들로 부터 자유로웠을 터였다. '왕'이라는 명칭도 그저 이질적인 중국식 명칭이었을 텐데, 굳이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최근 한국 사극들이 특히 중국의 동북정공에 맞선다는 고구려 관련 사극들까지  
 '황제'나 '폐하'같은 중국식 표현에 얽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크게 관심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민족적인 자긍심이 '황제'나 '폐하' 같은 중국식 존칭으로 회복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중국식 호칭을 의식하기에 한국의 사극들도 그런 중국식 호칭에 얽매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영화 <황산벌>이 '전하'나 '폐하'가 아닌 '어라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참으로 신선하고 높게 평가할 만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상고시대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TV의 사극들도 사학계나 국문학계의 연구결과를 수용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에, '왕'보다는 '황제'가 높은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래서 옛부터 '황제국'을 자처해왔던 중국에 꿇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도 '황제'라는 폼나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욕구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알겠다. 그 내면의 욕구가 TV의 사극들을 통해서 분출되고 있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 욕구의 원인은 결국 중국에 대한 열등감이 아닐까? 이 열등감 떨쳐버리고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던 삼국시대 그대로의 모습을 사극에서 조명해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지금까지의 사극들, 중국식 호칭들이 마치 한국어처럼 사용되던 사극에 길들여진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이질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질감은 다큐멘터리 같은 부분들로 뒷받침을 해주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명칭 부분에서 중국식 호칭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해서 제작비가 크게 상승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청률 면에서 악영향이 생기려나?)

어쨌든, TV의 사극들이 진정 민족의 자긍심을 찾고 싶다면 '당시'를 직시하는 태도를 요구하고 싶다. 학계의 연구성과들을 무시하고 단지 중국에 꿇리지 않기 위해 중국식 호칭인 '황제'나 '폐하'로 맞서겠다는 태도는 역사왜곡을 떠나서 너무 기계적이고 단순한 대응 아닌가?